(회개)변화를 인정하는 심리학
[변화를 인정하는 심리학]
목회를 할수록 목회자도 변하고 교인들도 변해가는 경험을 하게 된다. 연령과 경험의 증가는 인간에게 변화를 가져 오게 마련이다. 그러나 "해 아래 새 것이 없다"(전1:9)는 고전적 사상으로부터 근대의 `프로이드'에 이르기까지 "변하기 어렵다"는 사상이 없지는 않다. `프로이드'에게 있어서는 어린시절이 가장 중요하다. 그는 과거지향적인 결정론을 가졌다. 동양의 사주도 운명이 태어날 때 정해진다는 과거지향적 결정론이다. 존 로크, 데이빗 흄등이 주장하는 경험론에서도 인간은 백지와 같은 것이지만 경험되어진 것에 의하여 인간이 결정된다고 했다. 경험은 과거이다.
그러나 `알포트'나 `융'이나 과정철학의 영향을 받는 심리학에서는 사람을 미래지향적으로 보며, 따라서 어느 연령에 있어서도 상황에 따라 변할 수 있고 새로워 질 수 있다고 본다. 사회심리학은 사람은 별할 수 있다고 본다. 그러니 사람은 되어가고 있는 존재이다. 사람은 자아실현의 과정에 있는 것이다. 사람이 화석이 아닌 바에야 변화는 존재이다.
살아있는 모든 것은 변한다. 목회자는 언제나 과거지향적으로 사람을 보아서는 안되고 미래지향적인 눈으로 보아야 한다.
그러나 성서적으로 볼 때 겉사람은 나날이 낡아지고 있으므로(고후 4:16) 새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어떤 조건이 필요하다. 그것은 영으로 새로워져서 가능하며 `그리스도 안에 있어서'(고후5:16-17) 가능하다. 또 거룩함으로 지음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을 때'(엡4:24)가능하고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으실 때'(엡2:15) 가능하다.
즉 새로운 존재는 자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어떤 타력, 성령의 힘으로 가능하다. 인간 내적인 인간힘이나 세계 내적인 지혜로써 새로워지는 것이 아니다.
기독교의 진리는 이론의 진리가 아니라 경험의 진리요 실험해 보아야 알 진리이다.
만물을 새롭게 하신다는 바로 그분에게(계21:15) 완전히 위임할 때 새로와지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기독교의 중심 메시지이자 신약의 마지막 메시지는 만물이 새롭게 된다는 메시지이다.(계21:22) 새롭게 될 수 있다는 것은 낡아지는 현실속에서 유일한 복음이다.
순수한 종교적 회심은 위기의 결과로 생긴다. 궁극적 관심이란 위기에 봉착할 때 일어나는 것이다. 목숨을 걸 만큼 어떤 진지한 자리에 임하기 전에는 회심의 몸가짐이 준비되지 않는다. 심층심리학적으로 말하자면 욕구를 만족시키려고만 하는 감성과 형벌적인 초자아의 심한 충돌에서 위기가 발생한다. 자아는 이 두개의 압력 사이에서 샌드위치처럼 끼워 통전을 꾀한다. 위기는 감성과 초자아 사이에 모순, 상충감이 심할 때 오게 된다.
위기를 맞았을 때 회심을 경험한 사람은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라 그의 삶을 빈자를 위한 봉사에 바친다. 그는 자신의 위기를 동적이고 생산적인 방향으로 전환시킨다. 여기서 "내속에는 내가 아니라 그리스도가 살아 계시다"는 바울의 고백이 나오고, `본 회퍼'가 말한 것처럼 그리스도의 규범을 자신속에 형성하는 것이 과제가 된다.
여기서 신생은 `G.W 알포트'가 말한 전환이며, 그것은 실존적인 위기, 타자(절대타자도 포함)와의 창조적 관계로 전환시키는 데서 온다고 볼 수 있다.
위기는 그 자체가 비극이라기보다는 위기를 창조적인 기회로 전환시키지 못하는 것이 비극이다. 역사에는 순탄한 사람들이 위인이 된 것이다.
회심에 대한 또 하나의 심리학적 조명은 반동형성이다. 사람의 마음은 언제나 불안정한 것이어서 두개의 상반되는 정서를 가지게 된다. 반동형성은 상반되는 어느 한쪽을 강조하기 위하여 다른 한쪽을 억압하는 상태이다.
극악무도한 범죄자는 악한 마음을 강조하기 위하여 선한 마음을 억압한 상태이다. 그러니까 선한 마음이 전연 없는 것이 아니라, 무엇으로 가리워져 있는 것이다. 이것이 어떠한 동기로 인해 반대가 되어, 억압되었던 것이 강조되고 강조되었던 것이 억압되는 현상을 회심이라 한다. 이 계기는 어떤 사랑이나 충격이나 성령의 은사로 생기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