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신)한국의 슈바이처 장기려박사
한국의 슈바이처 장기려박사
"죽기전에 이북에 있는 가족들을 만나 두손 붙들고 예수님 믿고, 예수님 따라가야 한다고 전해야 되는데...그래도 두 어깨가 너무 아파 저녁에 잠이 통안오면 그냥 영원히 눈을 감고 싶어지기도 해."
지난 95년 1월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밝힌 장기려박사의 소망은 단하나, 북녘에 두고온 가족을 전도하여 천국에서라도 영원한 행복을 누리는 것이었다.
"저녁에 가서 우리 가족들을 만나면 헤어지지 않고 영원히 살건데 그리 안타까울 것도 없지..."
남쪽에서 가난한 사람을 도우며 사랑을 몸소 실천한 장박사는 자신이 남을 도우면 누군가도 북쪽에 있는 자기 가족을 돌봐주리라는 믿음으로 늘 기도하며 살았다.
그런 그가 끝내 가족과의 만남을 이루지 못한채 세상을 떠난것은 지난 12월 25일 아기예수 탄생의 기쁨으로 온세상이 들떠있을 때였다.
"나의 비문에 `주를 섬기다 간 사람'이라고 적어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향년 85세의 나이로 타계한 장박사는 가난한 자와 병든 자를 돌보라는 주님의 말씀에 철저히 순종한 예수의 참 제자였다.
의술이 아닌 인술을 베풀며 살아온 장박사가 가족과 헤어져 차남 가용(61. 서울대 의대교수)씨만 데리고 월남한 것은 지난 51년 1.4후퇴때다
잠깐 헤어지는 줄로만 알았던 이 이별이 40여년이 넘도록 계속될 줄 그는 꿈에도 생각못했다. 그래서 눈만 감아도 자신이 살던 이북의 고향마을이 눈앞에 아른거린다고 장박사는 밝힌바 있다.
1911년 평안북도 용천군 양하면 입암동에서 국민학교 교장선생님의 차남으로 장기려박사가 태어났을때 환갑을 맞은 그의 할머니는 독실한 신앙인이었다.
당시는 이북교회에 부흥운동이 한창이던 때로 장박사가 살던 입암동중앙에도 교회가 들어서 있었고 할머니는 어린 장박사를 등에 업고 교회에 다녔다. 장박사의 믿음은 이렇게 시작됐다.
독실한 신앙과 사랑실천으로 일관해온 그도 삶속에서 잘못을 범한적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친구의 팽이를 훔친일, 송도고보시절 화투놀이에 빠져지내던 일, 일본인 간호원의 빰을 때린일 등 그도 한때 말씀에 어긋나는 행동을 더러 했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는 곧 회개했고 기도로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는 점이다.
의사의 진료를 한번도 못받고 죽어가는 사람들을 위해 평생을 바치겠다고 결심한 장박사는 경성의전을 수석으로 졸업하던 해에 김봉숙씨와 결혼했다.
경성의전 수석졸업생답게 장기려박사는 첫수술때 맹장수술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그후 맹장염을 4년간 실험연구, 나고야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3년뒤인 1943년 간암수술을 최초로 성공시키는 등 의학계에 명성을 쌓아갔다.
그의 명성은 두갈래로 갈라지는 조국의 상황에도 아랑곳없이 놀아만 갔고 김일성대 의과대학에서 강의를 요청받는 등 활발한 활동을 벌였다. 그러나 기독교의 박해가 심해지고 끝내 공산당에 가입하지 않아 공산당의 감시를 받던 장박사는 "서울대에 자리를 마련하겠다"는 백인제교수의 편지를 기억, 월남을 결심하게 됐고 안타깝게도 뒤따라 올 것이라 믿었던 가족들과는 영원히 이별하게 되었다.
그의 위대한 업적은 월남후 더욱 빛을 발한다. 부산에 도착한 장박사는 영도제3교회 창고를 얻어 피난민의 무료진료를 위해 복음병원을 개설했다. 그는 "치료는 의사가 하고 병은 하나님께서 낫게 하신다"는 신념으로 환자를 진료하여 악조건속에서도 매일 2백여명의 환자를 치료하고 순회진료를 다니는 등 의사로서 최선을 다했다.
그런던중 장박사는 1956년 더이상 천막병원이 아닌 2백50평규모의 새병원에서 환자를 진료하게 됐다.
치료비가 없는 입원환자에겐 주머니를 털어 퇴원시켜주고 그도 않되면 "오늘밤 몰래 뒷문으로 도망치게"라며 넌지시 일러주던 장박사의 모습은 의술을 지닌 사람들에게 두고 두고 기억될 모범이 아닐 수 없다.
의료보험의 시초인 `청십자운동'을 벌이며 빈민의 의료구호만을 위해 60여년간 외길을 걸어온 장기려 박사.
지난 91년 미국에 사는 조카를 통해 이북에 있는 부인과 두딸의 사진, 부인의 육성녹음 등을 알아보고 통일될 날만 기다리며 기도하던 장박사는 이제 이땅이 아닌 하늘에서 가족을 기다리게 됐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영원한 약속을 위해 혼자살아온 장박사를 두고 세간에서는 "아무리 독실한 기독교신앙인이라도 인간적인 외로움은 마음에 한으로 남았을 것"이라며 섣부른 예측을 한다.
그러나 참신앙으로 예수의 삶을 실천한 장기려박사야말로 주님과 평생 동거하며 누구보다 다복한 삶을 누리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환자들을 가족삼아, 환자들을 이웃삼아 살아간 장기려박사에게 위안과 힘이되어 주신 주님이 있었기에 그는 인간적인 외로움을 견딜 수 있었을 것이다.
"의사를 한번도 못보고 죽어가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평생을 바치겠습니다. 저 뒷산의 바위들 처럼 환자들을 위해 항상 서있을 의사가 되겠습니다."
이제 하나님 품에 안겨 영원한 안식을 누릴 장박사의 생전의 삶에 감사와 존경을 표하는 많은 사람들이 또 그의 뒤를 이어 참 제자로서의 사명을 감당하길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