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하는 스타킹

철학하는 스타킹
미국 소비자 단체에서는 10 년마다 중요 생활필수품 가운데 가장 값이 소폭으로 오른 품목을 여왕으로 삼아 저물가 축제(低物價 祝祭)를 벌인다. 대형화한 그 품목들을 높이 쳐들고 가장행진을 한다던데 본뜸직한 신나는 소비자 운동이랄 수 있겠다.
우리 나라에서 이 저물가의 여왕을 뽑는다면 그 영예는 어떤 품목이 차지할까. 근간 통계를 보니 단연 스타킹이었다. 한 켤레 풀어 보면 6 km나 되는 가느다란 실날이 36만 올이나 홀치고 얽혀 있는 초세공(超細工)이라는 데, 저물가로 일관돼 왔다는 것이 더욱 기특하다.
스타킹 축제가 벌어진다면 스타킹을 신긴 마네킹 다리를 쳐들고 시가행진을 하게 될 것이요, 고물가(高物價)에 시달린 시민들은 앞을 다투어 그 다리에 키스를 하려고 들 것이다. 칼라일이 `의상철학(衣裳哲學)'에서 예찬했듯이 `스타킹을 머리에 쓰고 모자를 발에 신고' 뛰어드는 영세민도 있을 것이다. 스타킹은 이처럼 저물가의 깃발일 뿐 아니라 우리 나라에 있어 평등사상(平等思想)의 깃발이기도 했다. 19 세기 초엽 천주교를 신봉하는 신자가 비신자를 믿게 끔 설득하는 데 있어 가장 컸던 고충은 양반 상놈, 적자 서자, 남녀 노유 같은 계급의식이었다 한다.
천당은 좁고 입구도 바늘구멍 만하다 던데 어떻게 상놈이나 서자가-, 또 미천한 계집이 들어갈 틈이 있겠느냐는 것이 믿음을 외면하는 큰 이유였다. 이 난관을 극복하는 데 동원된 선교 도구(宣敎 道具)가 바로 프랑스 신부들이 신고 들어온 양말이었다.
`믿음이란 지극히 공평한 것으로 그 앞에서는 양반도 상놈도 지아비도 지어미도 또 어른도 아이도 없습니다. 그것은 마치 이 양말이 부드럽고 탄력이 있어 어느 누구의 발에도 신을 수 있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하고 양말을 신겨만 보이면 손쉽게 깨닫고 믿음에 들곤 했음이 1839 년에 순교(殉敎)한 베드로 신대보(神大輔)가 샤스탕 신부에게 부친 편지 가운데 적혀 있다.
한국에 있어 이렇게 약자 편에 서서 철학을 했던 스타킹이 여전히 약자 편에 서서 경제(經濟)를 하고 있으니 스타킹은 참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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