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과 스님

중과 스님
율곡(栗谷)선생은 외롭게 사시던 어머니 (신사임당(申師任堂))가 돌아가시자 인생의 허망함을 가눌 길 없어 1년 동안 속계(俗界)를 버리고 입산(入山)을 했었다. 열 아홉 살 때 일이었다. 한데 불교를 배척하고 중을 천대했던 때라 그 선문(禪門) 1년이 인생에 지울 수 없는 흉터처럼 되어 과거에 급제한 뒤 문묘(文廟)에서 공자(孔子)에게 배례할 때도 그 때문에 따돌림을 당하고, 또 홍문관 교리(弘文館敎理) 적에는 그 때문에 비장한 사직소(辭職疏)를 올리기도 했으며, 죽은 후에도 두고두고 학계의 쟁점(爭點)이 됐었다.
`중'이란 호칭을 싸고 도는 이미지는 이 같은 학문의 거인까지도 오염시키기에 충분했던 것이다. 하물며 여염에서랴 . 개화기 때까지만 해도 중은 성문 안에 발을 들여 놓지도 못하게 했으리만큼 천대했다. 근대화과정에서 여건은 달라졌지만 그 호칭에 체질화된 이미지는 좋아지질 않고 있다. 그래서 국정교과서에 기술된 `중'이라는 호칭을 기폭제(起爆劑)로하여 불교계에서 수정을 건의, 중이란 말을 불식하는 운동으로 번질 기세다. 이해도 가고 전근대적 유물 청산이란 차원에서도 그러했어야 했다.
중이란 본래 좋은 뜻이었다.
불교의 성직자(聖職者)를 뜻하는 범어(梵語)의 Samgha를 한문으로 옮길 때 음대로 승가(僧伽)라 했고, 의역(意譯)으로는 `중(衆)'이라 했던 것이 그 뿌리다. `대지도론(大智度論)'에 보면 고대 불교에서는 4 명 이상의 비구(比丘)가 화합하여 불사(佛事)를 베풀었기로 무리 `중'이라 불렀다 했다.
`숲을 이루는 나무를 낱낱 숲이라 이르지 않지만 그 낱낱의 나무 없이 숲을 이룰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라고 승(僧)을 집단적으로 파악, `중'이란 말이 생겨났던 것 같다. 중이란 말은 고대 진(秦)나라 때부터 썼다던데 우리 나라에서는 불교가 융성했던 고려 때까지만 해도 중이라 부르지 않고 복(福)을 일구는 밭이란 뜻으로 `복전(福田)'이라 불렀다(계림유사(鷄林類事)).
따라서 중은 배불(排佛)정책을 썼던 조선 왕조 때 보편화 된 호칭이 아니었던가 싶다. 그 밖에도 승의 호칭으로 비구(比丘), 화상(和尙) 사문(沙門), 대덕(大德), 법사(法師), 선사(禪師) 등 많으나, 가장 이미지가 좋고 친근한 호칭은 존대말인 님 자가 붙은 스님일 것이다. 옛 문헌에 승을 존대해서 `사(師)'로 쓰고 있는 것으로 미뤄 그에서 `스님'이 비롯된 것이 아니면 절의 불사(佛事)를 맡아 하는 대자승(待者僧)이 그 어원이 아닌가 싶다. 소향시자(燒香侍者) 응객시자(應客侍者) 의발시자(衣鉢侍者)라 하여 불승(佛僧)이 하는 일이 분업화 돼 있었으며(백장청규(百丈淸規)), 그 같은 불사 측면에서 시자(侍者)-시님-스님이 된 것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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