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우월주의 만연
종교우월주의 만연-선교현장 등 곳곳에서 타종교와 마찰
■ 「종교다원주의」제기
기독교의 우월주의와 관련해서 무엇보다 먼저 정리되고 넘어가야 하는 것은 바로 `종교다원주의'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특히, 몇해전 이 문제와 관련해서 국내 굴지의 교단과 신학교에서 큰 파동이 일어난 이후, 한국교회는 여기에 무척이나 민감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 한마디로, 기독교와 하나님을 제외한 다른 종교의 이름이나 내용을 들먹이는 것 조차도 종교다원주의로 몰아 가는 것이 오늘 한국교회의 분위기이다.
여기서 우리는 `종교다원주의'의 의미를 되짚어 볼 필요가 있다. 한국교회가 `종교다원주의'를 두려워 하는 이유는, 그것이 기독교의 절대성을 부정하고 다른 종교에도 진리와 구원에 이르는 길이 있다는 생각을 내포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따라서 종교다원주의는 곧 기독교 자체에 대한 부정이라고 보고 있다.
그러나 기독교에서 `종교다원주의'를 말하기 시작한 이유는 선교와 대화의 필요성 때문이었다. 즉, 이전 세기에는 타종교의 실체를 부정하고 `개종'을 요구하는 것이 선교라고 여겨지던데 반해, 오늘날에 와서는 피선교지의 문화와 그들의 전통을 존중해야 한다는 관점에서 `종교다원주의'를 말하기 시작한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말하는 종교다원주의란, 기독교의 ㄹ절대성을 부정하자는 것이 아날, 다른 종교도 엄연히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와 우리의 선교사가 파송되는 지역에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하자는 것이다. 더욱이 요즘에 와서는 이른바 `생태학적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에서 각 지역의 토착문호와의 협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생각에서, 토착문화와 대화를 해나가는 출발점의 하나로 종교다원주의를 내세우는 경우가 많다. 토착민들이야말로 자신들의 터전에서 자연과 훌륭한 조화를 이루며 살아왔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렇게 본다면, 그동안 한국교회가 그토록 부정적으로 보아 온 `종교다원주의'는 오히려 `종교상대주의'라고 불러야 옳을성 싶다. 다른 종교의 존재를 인정한다는 것과 다른 종교에도 진리가 있다고 보는 것은 엄연히 다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가 경계해야 할 것은 기독교의 진리를 상대화시키는 `종교다원주의'이며, 우리 나라와 같이 여러 종교가 공존하는 사회에서는 다른 종교를 존중해 주고 그들과 대활르 시도해야 한다는 관점에서 `종교다원주의'를 봐야 한다는 것이다.
`다원주의'(Pluralism)라는 말 자체가 기독교의 `유일성'(unipuseness)과 `긍정적인 실재'(Ultimate Reality)를 부정하는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 또한 종교다원주의는 그리스도의 최종 명령인 선교의 사명을 원인무효화하는 것이기 때문에 받아들일 수 없다는 주장도 만만치 않다. 기독교를 믿는 입장에서는 충분히 가능한 주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다원주의'가 어떤 것이냐 하는 논쟁에 있지 않다. 세상의 모든 종교가 나름대로 자신들의 절대성을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같은 주장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오히려 문제는, `종교다원사회를 인정하는 것'(종교다원주의)를 자기 종교의 우월성을 훼손하는 것으로 여기는 의식에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같은 의식은 기독교의 경우 더욱 강하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기독교의 사명이 `땅그ㅌ가지 이르러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는 것'에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물론 기독교인의 선교열정을 탓하거나 막을 수는 없다. 다만, 다른 종교를 보는 시각이 너무도 편협하고 이기적이라는데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태도는 곳곳에서 마찰을 일으켜 왔다. 특히 우리나라는 헌법상 국교를 인정하지 않음에도, 마치 `기독교 국가'를 만들려는 듯이 보이는 기독교인들의 태도는 타종교로부터 질시와 비난의 대상이 되곤 했다.
여러 종교가 공존하고 있는 우리 사회에서 이제는 이같은 기독교 우월주의가 갈수록 설 자릴르 잃어 가고 있다. 이러한 태도는 오히려 선교에 좋지 않은 영향만을 미칠 뿐이다.
더욱이 오늘의 사회는, 정의와 평화, 그리고 삶의 터전인 지구환경을 보호하기 위해 온 인류가 함께 노력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따라서 기독교는 넓은 마음으로 `인류의 미래'를 위해 다른 종교와 대화하고 협력하는 자세를 가져야 할 것으로 보인다. 우리가 발을 붙이고 사는 곳이 바로 이 세상인 이상, 그에 대한 책임은 종교에 관계없이 누구나가 함께 져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대화와 협력의 과정이 기독교의 본질을 훼손한다거나 하나님의 절대성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 해외선교의 이중성
종교다원주의에 관한 한국교회의 이러한 이중성은 해외선교 현장에서도 그대로 표출되고 있어 문제가 되고 있다.
예컨대 해외에서 선교사역에 헌신하고 있는 한국교회 선교사들이 현지 종교단체나 원주민들로부터 물질적으로 혹은 정신적으로 피해를 당할 경우, 즉각적으로 반발하는 것이다. 선교사를 파송한 교회나 교단총회는 불미스런 사건이 발생하면 곧바로 해외대사관이나 관련 인사들을 총동원하여 사태해결에 노력한다. 한국인에 대한 차별대우라거나 심지어는 종교탄압이라는 이유로 이에대해 적극적으로 항의하는 것이다.
해외에 나가 있는 선교사들은 필연적으로 해당국가의 문화나 종교와 충돌하게 된다. 아무리 오랫동안 선교지의 문화를 배우고 익혔다고 해도 그것은 이론에 불과할 뿐, 현지에 도착하면 실생활에서 언어나 관습의 차이를 극복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문제들은 가끔씩 뜻밖의 사고를 불러 일으킨다.
이런 사고가 교회폐쇄나 선교사 추방으로 끝나면 다행이지만, 선교사에 대한 직접적인 공격이나 폭력 심지어는 살인으로 이어지면 문제는 심각해질 수밖에 없다. 사태가 이 정도에 이르면 문제는 더이상 종교적인 문제가 이날 외교문제로까지 비화된다.
지금가지 한국교회가 선교사를 파송할 때 `선교사'란 직함대신 의사나 사업가 등 다른 직함으로 파송해 왔던 것은 기술후진국에 기술을 전수해 준다는 명목외에 바로 이러한 문제들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불교나 힌두교 혹은 회교직역으로 파송될 경우 만약의 불상사에 대비하기 위해 이러한 조치가 불가피 했다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이러한 종교적 분쟁은 꼭 우리나라에만 국한된 경우는 아니다. 세계 곳곳에서는 거의 매일 종교적인 분쟁이 끊이지 않고 있다. 그 대표적인 예가 팔레스타인 분쟁이다. 다른 종교에 대한 직접적인 폭력으로 표출되는 것이다. 심지어 르완다 내전이나 보스니아 사태에서 볼 수 있듯이 종교전이 인종학살로까지 비화되는 경우가 인류역사에는 비일비재했다.
어쨌거나 한국교회는 외국선교사에 의해 복음을 받아들인지 1백년만에 복음을 세계로 전파하는 중차대한 사명을 감당하게 됐다. 그러나 국내에서 뿐만 아니라 해외에서조차 기독교 `이기주의'내지 `우월주의'적인 사고는 불필요한 오해와 마찰을 불러 일으켰다는게 선교담당자들의 한결같은 지적이다.
한국교회의 이러한 우월의식은 국내에서도 그대로 재현되고 있다. 다른 종교에 대해 조금도 인정하지 않으려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이러한 양상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기독교의 개종은 있을 수 있어도, 기독교에서 다른 종교로의 개종은 결코 묵과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해외에서 다른 종교 혹은 문화에 의해 핍박받을 땐 `종교탄압'이니 `인종차별'이니 하면서, 국내에서는 다른 종교단체에 대해 `이단'이니 `사이비'니 하는 말을 서슴치 않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문제가 발생하면 온갖 정치력과 조직력을 총동원하여 상대방을 제압하려한다.
물론 우리 크리스찬들은 기독교가 유일무이한 진리임을 믿는 사람들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 어떤 다른 것과도 양립될 수 없는 절대불변의 영원한 진리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진리는 다른 종교에 의해서도 객관적인 타당성을 인정받고 있다.
문제는 이러한 진리를 다른 사람들에게 어떻게 전달하느냐 하는 것, 바꿔말하면 선교의 방법이다. 아무런 전제도 없이 무조건 `갖다 떠넘기는' 식의 전도 혹은 `무조건 강요하는' 식의 전도는 오히려 역효과만 불러 일으킨 다는 사실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심지어 어떤 경우엔 다른 종교를 아무 이유나 근거없이 다분히 `감정적으로' 평가하는 사례도 종종 발생하고 있어 공존을 주장하는 사람들을 안타깝게 하고 있다.
더욱이 아무도 문제시 하지 않는 부분들에 대해 기독교 혼자서만 문제제기를 함으로써 교회를 사회로부터 고립시키는 불행한 결과를 초래한 사건도 부지기수다. 특히 이런 종류의 문제제기는 대개가 종교적 배경과 근원을 가진 사건으로 알려져 기독교인들의 상식이 `의심'받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이러한 양상들은 한국 기독교가 진리를 독단하는 데서 비롯된 모습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기독교 외엔 구원이나 진리가 있을 수 없다』고 주장하는 것과 『기독교를 믿지 않으면 죽는다」고 주장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것이다. 진리를 믿는 사람은 진리를 주장하면서 진리대로 살면 될 뿐이지만, 믿음 아니면 죽음이라는 선언은 참다운 종교가 가질 태도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태도는 식민지개척시대에 백인선교사들이 `한손엔 성경을, 다른 한손엔 칼을'쥐고 원주민들을 위협하던 것과 하등 다르게 없는 것이다. 종교적 진리란 인간에게 생명과 희망을 주는 것이지 죽음과 절망을 주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현재 세계교회는 에큐메니칼운동이라고 하는 거대한 흐름속에서 움직이고 있다. `교회연합' 혹은 `교회일치'를 뜻하는 이 운동은 기독교의 각 교파간의 연대와 화합을 주장하면서 동시에 다른 종교와의 대화와 관용을 모색하는 것이다. 기독교 내에서는 물론이려니와 다른 종교와의 관계에서도 대화와 관용의 정신이 없으면 공존은 불가능하다는 인식이 에큐메니칼운동의 저변에 깔려 있다.
그런 의미에서 대화와 관용을 통해 인정된 진리만이 모든 사람에게 자연스럽게 스며들 수 있다는 사실을 한국교회는 다시한번 인식해야 할 것이다.
■ 대화.관용 절실
현재 우리는 종교다원주의 시대에 살고 있다. 특히 뿌리깊은 민속신앙을 비롯 유교, 불교등의 다양한 종교가 함께 공존하고 있는 상황에서 기독교의 우월성은 자칫 종교간의 갈등과 분쟁을 가져올 수 있다는 지적이다.
역사적으로 볼때 기독교는 전통적으로 기독교만이 참종교요 절대 종교라고 믿는 기독교 절대 주의 입장을 견지해 왔다 그러나 현대에 들어와서 이러한 절대 종교 사상은 여러면에서 도전을 받고 있다.
그러나 교계 많은 신학자들이나 목회자들이 염려하는 것은 기독교의 절대주의 보다는 상황에 따른 기독교인들의 이중적인 태도이다. 한국교회 목회자들이나 평신도들을 대상으로 타종교에 대한 설문조사를 하면 이같은 현상을 금방 알 수 있다. 설문조사에 응하는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타종교에 대해 `구원은 없지만 그 존재 가치는 인정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면서도 이들은 또 `타종교는 모두 우상숭배이므로 그들을 깨우쳐 주어야 한다'고 응답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는 것이다.
사실 세계 종교사를 살펴보더라도 기독교처럼 자신을 절대적으로 유일한 종교 혹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유일한 계시하고 주장하는 종교는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이러한 기독교의 절대 주의가 다름아닌 다원종교를 주장하는 사람들 보다도 기독교의 절대주의를 주장하는 사람들에 의해 크게 도전을 받고 있다는 지적이 심심찮게 제기되고 있는 것이다.
한국교회 목회자들은 어떤 자리에 가서는 다원종교를 인정하다가도 상황이 바뀌면 곧바로 기독교의절대주의를 부르짖어 타종교 사람들은 물론 많은 기독교인들에게 혼란을 주고 있다는 설명이다. 이같은 현상은 앞에서도 지적한 바와 같이 특히 이슬람이나 회교등의 선교국에서 흔히 볼 수 있다는 것이다.
한국의 기독교는 그동안 선교초기 서구 선교사들이 그랬던 것처럼 배타적인 선교정책을 써왔기 때문에 종교다원주의 사회에서 선교정책을 정립하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지난 수세기동안 기독교는 예수의 유일성과 보편성에 근거해 왔다. 그것은 예수가 완전한 인간이면서 동시에 완전한 하나님이라는 믿음인 것이다. 이런 신조에 의하여 스스로 모든 진리에 있어서 완벽하다고 믿어온 교회는 중세 이후 고립된 생활을 자랑스럽게 영위하고 외부 세계에 대해 배타적인 태ㅐ도를 고수해 왔던 것이다. 타종교와의 대화란 있을 수 없었다.
하지만 이러한 절대주의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변화를 겪게 되었다. 다른 종교들과 대화를 시작했으며 다른 종교의 정신적 가치를 인정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현재까지도 한국의 기독교는 타종교에 대해 폐쇄적인 배타주의를 고수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발르트의 주장처럼 기독교만이 신의 은총과 계시가 나타나는 유일한 종교라는 입장이다.
그러나 한국교회 일각에서는 `그동안 한국교회가 타종교에 대해서 너무 극단적 배타주의적이며 독선적이며 획일주의적인 입장만을 고수, 기독교의 우월성과 그리스도 계시의 유일성을 강조하는데만 급급했다'고 비판하며 앞으로 교회가 나아가야 할 새로운 방향으로 타종교와의 상호존중적 진지한 대화를 해야 한다는 주장이 끊임없이 제기돼 왔다.
이에 반해 보수권을 자칭하는 대부분의 목회자들은 기독교의 특성을 무시하는 타종교와의 대화나 현재 종교다원주의적 입장에 강한 반발을 보이고 있다. 감리교의 홍정수교수나 변선환교수 사건은 이같은 입장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교회가 종교적 다원사회를 직시하고 서구의 신학과 발맞추어 `대화' 라는 형식으로 타종교에 대한 신학적 이해를 시도하기 시작한 것은 최근의 일이다. 그러나 이러한 `대화'는 기독교의 우월성을 고수하며 끝까지 대화를 거부하는 보수주의자들로부터 기독교의 교리를 약화시킨다는 비판에 직면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 점은 타종교와의 대화에 앞서 먼저 한국교회 내부의 입장에서지 않으면 많은 혼란을 야기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말해주는 대목으로 한국교회가 시급히 해결해야 할 커다란 숙제가 아닐 수 없다.
한국 사회는 종교적으로 볼때 다원주의 사회임을 누구나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한 집안에서 조차 종교가 기독교, 불교, 카톨릭, 원불교, 천도교 등의 여러 종교가 공존하고 있는 것을 흔히 볼 수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국교회가 기독교의 절대진리를 고수하면서 평화를 공존해 갈 수 있는 길은 무엇인가 곰곰히 생각해 봐야 할 것이다.